미국 외교사에서의 순간들

2019. 8. 21. 20:04History

1979년 11월 4일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에 대한 공격과 그 후 444일 간의 미국 인력에 대한 투옥은 전설의 소재가 되었다. 이 사건은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이 매일같이 뉴스에서 그 뒤를 따랐고, 그들 중 다수는 연대의 표시로 나무와 그들의 집에 노란 리본을 달았다.


아카데미상 수상작인 아르고의 소재였고, 결국 지미 카터 대통령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테헤란 대사관에 대한 공격이 있은 지 불과 17일 만에 일어났던 유사한 극적인 공격을 떠올리기 힘들 것이다.


11월 21일, 사우디 아라비아의 이슬람 사이트에 대한 미국의 공격이라는 이란의 거짓 라디오 주장에 자극받은 폭도들은 미국 대사관을 습격하여, 통신 금고 안에 130명 이상의 사람들을 몇 시간 동안 가두었다. 젊은 해양경비대 스티브 크롤리를 포함해 여러 명이 사망했다. 대사관 전체가 불에 탔고 결국 파키스탄 정부의 돈으로 다시 지어야 했다.


통상, 한 나라의 지도자와의 의사소통은 그러한 상황을 평가하고 외국 대사관을 공격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단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경우 지아 알 하크 파키스탄 대통령은 자전거를 타고 시골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연락이 닿지 않았다.


대사관저에 대한 포위는 몇 시간 동안 계속되었는데, 군대가 지연되거나 단순히 대사관 금고에 갇힌 미국 외교관들과 직원들을 구출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링턴 킹은 이슬라마바드 대사관의 부대표였다. 11월 21일 포위전 내내 그는 주최측과 미친 듯이 협력하여 그들이 호응하도록 했다.

허버트 해거티는 금고 안에 갇힌 대사관 직원들 중 한 명이었다. 킹은 1990년 4월부터 찰스 스튜어트 케네디와 인터뷰를 했다.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이슬라마바드 대사관의 정치 고문인 하거티는 2001년 7월부터 찰스 스튜어트 킹과 인터뷰를 했다.


대사관 보안에 관한 다른 순간들을 위해 여기 가봐. 파키스탄에 대한 다른 순간들을 읽어라. 예를 들어, 이슬라마바드 대사관을 재건하는 것을 둘러싼 관료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라.


이제 당신은 파키스탄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이곳은 감정적으로 불안한 곳인데, 한때 이탈리아인들이 무함마드에 관한 영화를 만들거나, 무함마드에 관한 영화를 만들려 할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탈리아 대사관을 불태우려고 행진했는데, 그들을 되돌리는데 군대가 필요했다. 이것은 우리가 신문에서 얻은 것이다. 이런 상황을 부추기기 쉽다. 당신은 크고, 매우 가난하고, 무지한 인구를 가지고 있고, 매우 종교적이고 감정적이며, 만약 그들이 시아파라면, 그것은 스페이드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칸베라처럼 이슬라마바드는 인공적인 도시이기 때문에 보안에 대해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데서나 지어졌고, 도시인구도 없고, 모두 외교관들과 관료들로 구성되어 있다. 산업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정부는 그곳의 보안을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라왈핀디의 주요 인구 중심지는 20마일 정도 떨어져 있다.


제 생각에, 그들이 느낀 감정은, 혹은 나중에 주장했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20마일이나 되는 이 경관을 지나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힐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6차선 고속도로가 공항으로 가고 나서 라왈핀디로 가는 겁니다. 그러니 네가 정말 해야 할 일은 그냥 길을 닫는 것뿐이야.


문제는 그들이 길을 닫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말이 돌자 누군가 미국 대사관을 공격해서 미국인에게 복수해야 한다고 했어 물론 우리는 이 사실을 그 당시에 전혀 알지 못했다.


라왈핀디는 카이버 고갯길을 가는 트럭 노선의 한 종점으로, 이 대형 트럭들, 구식 차량들은 노스웨스트 프론티어 주와 펀자브 사이를 왕복으로 많이 다닌다. 라왈핀디에는 큰 시장 지역이 있는데, 어느 날엔가 이 큰 트럭 수백 대가 한 대에 짐을 싣고 돌아오는 여행을 위해 뭔가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폭도들은 트럭 운전사들을 이슬라마바드로 데려가게 했고, 그들은 수천명을 들여왔다.


"벽은 아무도 오래 말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트럭을 몰고 벽을 통과했어."

나는 집으로 쫓겨갔다. 15분 정도 갔을 때 "돌아오지 마, 거기 그대로 있어. 대사관을 행진하는 군중이 있어." 나는 그렇게 했고, [아더 험멜] 대사도 점심을 먹으러 집에 와 있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다.


그날 대사관에 있었던 150명 중 몇 명의 요행수로 인해, 이 일이 일어났을 때 단지 5명만이 영내 밖에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큰 새 대사관이었다. 그것은 2,300만 달러가 들었다. 그게 우리가 제기한 주장이고, 그 주위에는 커다란 벽돌 벽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안다. 

창문에 창살도 있고, 커다란 미닫이 금속문도 있고, 그런 것도 많았어. 그것은 최고가 아니라 합리적으로 훌륭한 보안이었지만, 상황을 고려할 때, 우리는 아마도 그것이 라왈핀디 시내에 있었다면 가질 수 있었던 만큼 그것에 집중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벽은 아무도 오래 말리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벽을 뚫고 트럭을 몰았다.


대사관 내부에는 좋은 조율이 있었다. 행정고문, 정치고문, 그리고 몇몇 사람들이 일을 주도했다. 그들은 모든 금고를 잠그고 금고로 돌아갔다. 금고 위층에 있었는데 3층짜리 건물이야 해병대는 밖에 배치되었고, 결국 모두 금고로 퇴각했다.


지붕 위에 한 명의 해병은 망을 보고 있었고, 그는 무기를 가지고 있는 누군가에 의해 살해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던 것이겠지만, 경찰 분견대를 제압하고, 무기를 빼앗았고, 그런 무기를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볼트로"

허버트 해거티, 정치 고문, 1977-1981


엠브 테헤란 볼트HAGERTY: 대사관은 전력을 다해서 공격을 받고 금고까지 안전을 위해 퇴역했을 때, 우리는 137명 정도의 미국인과 87명의 파키스탄인으로, 휴가중이거나 아메리칸 클럽에서, 혹은 다른 곳에서 점령당한 사람들을 세지 않았다.


우리는 이전에 그 훈련을 했고, 우리는 또한 그들의 두려움을 진정시키고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정부에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시도하기 위해 대사관 강당에서 거주하고 있는 미국인 커뮤니티와 회의를 가졌다. 


우리는 정부의 모든 수준과 접촉했다. 관저에서 점심식사를 할 때 1마일 떨어진 곳에 있던 대사는 [대통령] 지아의 사무실과 외무장관과 전화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DCM도 점심때 집에 있었다. 이것이 일상이었다.


내가 점심을 먹으러 집에 없는 유일한 이유는 델리에서 막 도착한 타임지 특파원과 함께 대사관에서 점심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인파가 왔을 때, 나는 그녀에게 카페테리아로 가서 이 데모를 처분할 때까지 나를 기다리라고 말했었다. 그녀는 결국 오후 내내 우리와 함께 금고에 있었다.


음, 우리가 그들에게서 들은 것은 이 군중, 즉 이 정도 크기의 군중이 우리 문 앞에 형성되었다는 사실상의 불신이었다.